청년 이종기 : 일하면서 배우자

80년대 초는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용인 시골에서 자란 소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수원 도회지로 나가니 그야말로 촌놈이 출세를 한것이다.
없는것 빼놓고 다 있을것만 같은 수원시내는 높은 빌딩과 수많은 차들로 넘쳤고 무엇보다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에 모습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첫발을 내 딛는 가슴벅차고 설레이는 순간이었다.

수원농고에 입학한 나는 중학교때와는 달리 꿈이 있었기에 그 어느때보다 행복했고 희망에 차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동창생들과의 꿈같은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던 나는 내성적이었던 성격탓에 고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웅변반에 들어가 연설을 배우게 되고 이때에 경험이 먼 훗날에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가세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질 않고 아버지는 날마다 술에 의지한채 살아가셨고 어머니 혼자서 자식 4남매를 키우셔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누우셨고 나는 남부금을 제때에 내지 못하여 방황하다가 결국엔 2학년 가을에 자퇴를 하였다.

나는 1965년 뱀띠다.
7월 한여름에 태어났으니 독기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뱀띠들은 성격이 강하고 자존심이 세다고들 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특별했던 듯 싶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 전봇대에 붙어 있는 ‘일하면서 배우자’ 라는 아르바이트 모집 전단지를 보고 찾아가 시작된 아르바이트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난 후 안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강원도 정선 탄광촌을 찾아 갔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퇴짜 맞고 찾아간 속초에서 오징어 잡이 배를 석달간 탔고 3년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보따리 행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이때에 경험이 세상을 살면서 하면된다는 자신감과 보람이 나의 인생 통털어 가장 값지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80년대를 가리켜 386세대라고 부른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여는 대학생들처럼 나역시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울부짖었다.
늘 국회의원이 되겠다던 포부가 있었기에 고등학교때 웅변을 한 실력으로 당시에 신한민주당 소속이었던 박왕식 후보의 특별보좌역이 되었다.
수원?화성이 지역구였던 박왕식 후보의 연설문 작성과 유세활동을 따라 다니며 직접 지도 보좌하였고 결국 당선되었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선배나 동료들은 지금 모두 국회의원 내지 자치단체장 등 정치를 하고 있는데 나만 아이러니 하게도 정치의 대한 꿈은 오래전에 포기했다.

내게도 달콤했던 첫사랑이 있었다.
중학교때 같은 반 아이다.
대학에 가서는 가슴앓이는 뜨거운 사랑도 해봤다.
그 때의 상처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던 때에 군에 입대하였다.

강원도 철원군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군생활을 통해 아물지 않았던 내 의식은 한단계 더 성숙하게 되었고 의식의 세계를 봉합할 수 있었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군생활 만큼은 보람되고 긍지로서 복무했다.
병장 만기전역 할때까지 육군참모총장 상을 비롯 부대장 표창장 등 14번을 수상했고 내가 세운 포상휴가 18번의 기록은 전역 후에도 한동안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역 하던 날 파란만장 했던 나의 인생 지난날의 전반기를 회상하며 수유리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 딛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로 외쳤다.
“세상이여! 기다려라! 나 이종기가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