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이종기 : 용인군 포곡면 , 내사면에서 더벅머리 촌 아이로 자라나

아지랭이 피어 오르고 저 멀리 보이는 두개울 넘어 도사리 신작로에는 오래된 미루나무 가로수가 즐비하고 흙 먼지 뿌옇게 날리며 지나가는 완행버스는 나의 먼 기억속엔 어릴적 포곡의 추억을 한가득 실고 지나간다.

내가 태어나 살던 고향은 새원리(포곡면 신원2리 267번지)는 자연농원(현 애버랜드)이 들어서기 까지는 도시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엔 아주 시골이었고 그런 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농사지으며 살아 오신 광주이씨 22대손 이창재 선생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나의 부친이 4대 독자 외아들 이셨으니 손이 귀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으로 부터 다른 형제들 보다 미안하게도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소년시절은 커서 군수가 되라 하시던 청렴하신 할아버지와 유난히 불심히 강하셨던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지극정성이셨던 덕에 난 응석받이로 세상 겁 모르고 철없이 자랐다. 공부보다는 산과들로 천방지축 뛰놀며 다녔고 마을 앞으로는 큰 내천이 흐르기에 여름이면 벌거숭인 채로 멱을 감고 간식이 귀한 시절이라 날마다 물고기 잡이로 천렵을 하며 추억을 쌓았다.

아름답고 정겨운 사람들이 많은 용인에서 자란 소년 이종기는 훗날 어린시절의 추억을 담아 시인이 되기도 한다.

포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모현중학교로 입학 한 가을이 되던 해 , 고생을 모르고 자랐던 나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급기야는 살던 집이랑 전답을 모두 팔아서 빚을 갚고 내사면으로 이사를 하게 되며 용동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부모님은 남의 농토를 빌려 다시 농사를 지으셨고 우리가족은 처음으로 셋방살이를 시작하였다. 나는 새로운 환경속에서 자라며 처음으로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박장에서 도박하시는 아버지를 보게되고 경찰관을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날 어머니는 내손을 꼭 잡으시며 비바람이 몰아치는 캄캄한 이십리 길을 걸어 가시면서 우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아버지처럼 살지 말고 꼭 성공하라고 당부를 하셨다.
그후로 미래에 정의로운 국회의원이 되는것이 포부였던 나는 어느날 TV를 통해서 본 부농국가 네덜란드을 알게 된 후 우리나라를 세계 제일의 농업국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모두의 반대에도 무릎쓰고 수원농림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